신라 불교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배출하였다면 고려 불교에는 대각국사 의천과 보조국사 지눌이 있다. 조선 불교는? 서산대사와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를 꼽고 싶다. 서산대사가 임진왜란이라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전쟁영웅이었다면, 초의선사는 조선 차의 중흥조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 초의가 40년간 머무르면서 도를 닦은 암자가 바로 해남 대흥사의 부속암자인 일지암(一枝庵)이다. 일지암이 한국차(韓國茶)의 성지가 되는 셈이다. 3~4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40년을 머물렀다고 한다면 일지암은 초의선사와 특별히 궁합이 맞았던 터로
전북 고창군 고창 읍내에 있는 고택 경운장(耕雲莊). 밭을 가는 쟁기로 밭 대신 ‘구름을 간다’는 의미의 택호(宅號)이다. 낭만적인 제목이면서도 호방한 도가적 기풍이 느껴지는 작명이다. 원래 ‘경운조월(耕雲釣月)’이라는 청나라 시인의 시구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경운조월은 ‘구름을 갈고 달을 낚시질한다’는 뜻이다.세속 바깥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신선의 경지라고나 할까. 이런 택호를 내걸었으면 그 집 주인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한가롭게 신선처럼 살았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대개 이처럼 고상한 택호를 걸어 놓으면 그 반대의 상황을
천상세계가 있으면 지하세계도 있다고 믿었다. 인간 삶의 고통을 모두 벗어난 해탈의 세계가 천상세계라고 생각했다면 지하세계는 그 반대이다. 고통과 압제와 질곡이 더 심한 세계라고 고대인들은 믿었던 것이다. 불교에는 이 지하세계에 대한 천착이 있었다. 천착이라 함은 그 고통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신앙이 지장보살 신앙이다.소승불교인 남방불교와 대승불교인 북방불교를 구분할 때 가장 큰 분기점이 바로 보살 사상이다. 보살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에 목표가 있는 신이다. 종교라는 것이
유럽에 와인이 있다면 아시아에는 차(茶)가 있다. 차와 와인은 양쪽 문명을 대표하는 음료이다. 이 양대 음료에는 기호품이면서 동시에 기호품을 뛰어넘는 그 어떤 정신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와인에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가 들어 있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차(茶)에는 도(道)가 들어 있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동양에서는 단순히 마시는 음료를 뛰어넘어 차를 다도(茶道), 다예(茶藝)로까지 끌어올려 승화시켰다. 동양은 서양의 와인을 배우고 있고, 서양은 동양의 차를 귀하게 여겨 일찍이 아편전쟁까지 일으키지
한자로 물(勿) 자는 재미있다. ‘아니다’라는 뜻이다. 불(不) 자와 같이 쓰기도 한다.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고 하기도 하고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고 하기도 한다.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경남 산청군에 가면 ‘법물’ 김씨가 있다. 법물이 무슨 뜻인가 해서 살펴보니까 ‘勿(물)’이 관련되어 있었다. ‘勿’이 법이라는 이야기이다. 4가지 ‘勿’ 자가 들어가는 글귀는 비례물동(非禮勿動), 비례물언(非禮勿言),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견(非禮勿視)이다.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한국 현대사에서 전라도는 피를 많이 흘렸던 지역이다. 동학혁명의 와중에 죽은 사람이 3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20만명이 전라도 사람들이라는 추정이 있을 정도다. 6·25전쟁도 그렇다. 전라도는 지주와 소작 간에 갈등이 많았던 평야지대였다. 들판이 피를 불렀다. 서로가 서로를 찔러 죽였다.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많이 죽었다. 5·18은 또 어땠는가! 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급 문화의 유적지와 흔적 또한 전라도에 많이 남아 있다. 전라도 고급 문화의 예를 들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원림(園林)이다. 담양에 있는 소쇄원(瀟
20세기 초반부터 한국의 민족종교에서 특별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바로 ‘후천개벽설’이다. 후천(後天)은 선천(先天)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대략 5만년의 사이클을 두고 선천과 후천이 교대한다는 주장이다. 인류 문명사를 몇천 년 단위가 아닌 5만년 단위로 나누어 생각하는 스케일이다 보니 잘 믿어지지 않았다. 전반전 5만년이 끝나고 후반전 5만년이 시작되면 어떤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그 골자를 추리자면 ‘상놈이 양반 된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로 성장한다, 그리고 ‘수조남천(水潮南天) 수석북지(水汐北地)’가 발생한다’ 등이다.
인생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긴장을 이완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것이 곧 긴장이고, 돈을 번다는 것이 곧 긴장이고,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곧 긴장이다. 이 긴장이 축적되어서 암이 되고 병이 된다. 건강한 삶은 긴장을 이완시키는 데 달려 있다. 1980년대에 미국과 유럽의 먹물들을 감동시켰던 라즈니쉬의 설법 요체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릴렉스(relax)’였다. 라즈니쉬가 펴낸 책 500권의 요점이기도 하였다. 릴렉스! 말은 쉽다. 어떻게 릴렉스를 할 것이냐? 이건 어렵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거나 아니면 본인이 상당한 노력
누가 인물인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사람이 인물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조선시대의 인물은 이순신과 서산대사가 아닌가 싶다. 특히 서산대사는 머리를 깎은 승려였다. 불교가 무엇인가. 한 세상을 몽환포영(夢幻泡影)으로 보는 세계관이다. 즉 인생사 희로애락을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바라보는 관점인 것이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거기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는 충고를 담고 있다.그러나 살다 보면 이 충고를 따르기란 쉽지 않다. 눈앞에서 불똥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담담하게 바라다볼 수 있
소나무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어 온 장고송(張古松·82) 선생. 80대이지만 60대 정도의 체력을 지니고 있다. 필자가 작년에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 밑의 산장에서 장고송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눈빛이나 태도가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사람마다 풍기는 아우라가 있는 법인데, 그의 풍모가 신선같이 느껴졌다. 기인 장고송 선생과의 만남최근 그와 설악산의 오색약수터에 있는 그린야드호텔에서 4박5일 같은 방에 머무르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설악산에서 풍기는 기운은 어떻습니까?” “육산(肉山)인 지리산에 비해서 훨씬 강하죠. 전부
한자로 ‘만(卍)’ 자가 있다. 보면 볼수록 씹을 맛이 나오는 글자이다. 어떤 씹을 맛? 卍 자의 네 개 귀퉁이는 지·수·화·풍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말하는 4대(大)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4가지 물질적 요소다. ‘사대육신 멀쩡한 사람’ 할 때의 사대가 이 지수화풍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 사대로 흩어진다. 사대가 임시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이라는 이야기이다. 엄청난 인수분해이다.卍 자의 끄트머리를 구부려 놓은 이유는 팔랑개비처럼 돌아간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돌아간다는 것은 사라졌다가 또 돌아온다는 이치를 의미한
필자는 호남 출신이지만 그동안 영남의 명문 집안에 관심이 많았다. 고택이 남아 있고, 후손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을 하고 있고,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웠다고나 할까. 영남 집안들에 주력하다가 최근에 주목하게 된 집안이 호남 강진(康津)의 원주이씨(原州李氏)들이다.원주이씨들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월출산 때문이다. 필자는 굉장한 바위 덩어리로 이루어진 월출산을 영발(靈發)의 관점에서 주목해 왔다. 영발 앞에서 가방끈은 무력한 법이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기도발’이 짱인 산이다. 그중에서도 월출산 구정
경북 칠곡군 왜관(倭館)에 있는 매원(梅院)마을은 영남에서 유명한 명촌이다.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촌으로 꼽힌다. 매원은 또한 영남 최고의 부촌으로 꼽히던 동네였다. 구한말쯤에 천석군이 7명, 만석군이 3명이나 있었다. 호남이 아니고 영남에 만석군이 3명이나 있었다는 게 놀랍다. 그런데 동네 이름에 왜 ‘매화’가 들어가는가? 매원 주변을 매화꽃의 꽃심(꽃의 중심)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꽃심 주변에는 꽃잎이 있어야 한다. 꽃잎은 8개이다. 이 8개의 꽃잎은 모두 마을 주변 야산이다. 그리 높지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간에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뱃놀이다.기호학파에서는 뱃놀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영남학파에는 낙동강에서 배를 타고 노는 전통이 있었다. 여기에서 논다는 것은 강 옆의 기암절벽 같은 풍경을 즐기면서 선비들 간에 학문을 토론하고 서로 시를 짓고, 술을 한잔씩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것을 가리킨다. 뱃놀이는 학문토론과 술, 그리고 시를 짓는 조선시대 나름의 노는 방식이었다.놀 정도가 되려면 학문과 인품, 그리고 문학적 자질을 갖춰야 한다. 이런 조건이 미비되면 풍류를 즐길 수 없다. 주색잡기
전남 강진의 백련사가 지닌 남다른 의미는 ‘존재 그 자체로 평화스러운’ 삶을 살고 싶은 공부 모임이 고려 후기에 이 절에서 성행했다는 사실에 담겨 있다. 이름하여 ‘백련결사(白蓮結社)’. 불교에서 말하는 결사(結社)는 특별한 공부 모임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평화스러운 삶 추구한 백련결사백련(白蓮)은 하얀색 연꽃이다. 불교 경전 중에서도 ‘법화경(法華經)’을 상징하는 꽃이 백련이기도 하다. 법화경은 불교 교판학(敎判學)에서 볼 때 대승경전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완성된 경전이라고 일컬어진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라고나 할까, 사상적 차이라고나 할까. 명당에 묘를 쓰거나 집터를 잡음으로써 발복이 된다고 믿는 신앙을 갖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고, 일본은 그렇지 않다. 일본은 전부 화장(火葬)이다.조상과 후손, 죽은 자와 산 자가 텔레파시로 연결되는 매개물은 뼈이다. 화장을 하면 망자로부터의 연락이 일단 두절된다. 일본이 명당의 종교적 효력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망자로부터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서 국가 정책적으로 화장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렸고, 화장한 뼛가루를 동네 뒤의 공동묘지에 뿌리고 여기에다 돌비석을 세워
‘인걸은 지령(地靈)이라!’이것이 나의 화두였다. 어떻게 인걸과 지령이 서로 상관관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지령이 뭐길래? 과연 지령이라는 게 있긴 있는 것인가?어떤 인물이 태어나는 곳은 그 지역의 땅에 기운이 뭉쳐 있는 것이라는 이치를 깨닫는 데는 아마도 수천 년이 걸렸을 것이다. 인걸과 지령의 함수관계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천년 이상의 시간과 데이터가 필요하다. 시차를 두고서라도 그 지역에서 전국구 인물이 배출되어야만 지령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전남 영암군의 월출산 자락은 지령이 있다고 하기에 충분한 인물들을 배출하였
명당의 조건을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 지점에 해당하는 자리에 양기(陽氣)가 뭉쳐 있다고 보는 것이 한자문화권의 전형적인 명당 조건이다.또 하나의 명당 조건이 있다. 삼산양수(三山兩水)가 그것이다. 삼산(三山)이라는 것은 산 봉우리가 위에서부터 내려와서 세 번째 봉우리 밑이 좋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스리스텝’이다. 스리스텝 밑에 명당이 있다는 논리이다.왜 스리스텝이냐? 산의 봉우리가 여러 번 융기하였다가 밑으로 내려오면 그 내려오는 과정에서 땅의 기운이 부드러워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운이 너무 강
전남 강진(康津)읍에 가보니 읍내의 주산(主山)이 우두봉(牛頭峰)이었다. 소대가리 봉이라는 의미이다. 큰 소의 머리가 강진만 바다 쪽을 바라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냥 우두봉이 아니라 소 머리 주위에 여러 가지 ‘보조 장치’가 장착된 봉우리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어떤 장치? 우선 소 머리의 오른쪽 위치에 고성사(高聲寺)라는 절이 배치된 점이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세운 비보(裨補)사찰에 해당한다. 소의 오른쪽 귀에는 종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그 종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오른쪽 귀에 해당하는 부분에 절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는 가풍이 다르다.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영남학파는 아무래도 주리파(主理派)이다. ‘이(理)’에 치중하고 ‘이’에 신경쓰는 학풍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에 신경쓰면 어떻게 되는가? 어떤 행동 패턴을 보인단 말인가? 그걸 설명하면 이렇다.‘될 수 있으면 상대방을 속여먹지 말자. 양심적으로 살자. 약속은 지키자.’ 그러자면 함부로 약속을 남발하면 안 된다. 독서를 열심히 하고 호학(好學)하는 것이 양반의 가풍이고 도를 닦는 방법이다. ‘경박하게 처신하고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공부가 부족한 것이다. 쉽게 응답하지